오일러의 삶
오일러는 1707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태어났습니다. 처음에는 목사가 되기 위하여 바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베르누이 집안사람들과 사귀면서 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학사원에 간 베르누이 형제의 소개로 학사원의 의학부에 들어갔다. 얼마 있지 않아 수학부에도 적을 두었다. 1740년 오일러는 왕의 초대를 받아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오랜 기간 동안 그 학사원의 수학부장으로서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한데 점점 그곳에서의 인기가 떨어져 176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후에 그는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었다. 하지만 뛰어난 기억력과 우수한 정신력으로 연구를 계속하였다. 1734년 오일러는 아카데미 출신의 화가의 딸인 카타리나젤과 결혼했다.
그들은 네바강변에 거주하며 13명의 아이들을 낳았지만 어린 나이에 아이들이 대부분 죽고 5명만이 살아남았다.
수학자로서의 업적
그가 수학자로서의 연구를 시작한 시기는 뉴턴의 영향으로 해석기하학과 미적분학의 개념은 갖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역학이나 기하학의 분야는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일러는 미적분학을 발전시켜 무한해석 개론, 미분학원리 적분학원리 그리고 극대 또는 극소의 성질을 가진 곡선을 발견하는 방법을 창시하여 역학을 해석적으로 풀이하였다.
그리고 수학에서는 정수론 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많은 연구를 하였다. 그 연구들 중에서 삼각함수의 표현을 sin, cos, tan의 기호를 사용하여 표기하였다. 또한 오일러의 정리는 너무나도 유명하게 알려져 있다.
독일 베를린에 살던 시절 왕의 조카에게 자연과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쓴 독일 왕의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는 계몽서로서 유명하였으며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 되었다.
그는 대부분 독일 러시아에서 활동하였다. 해석학에서 최고의 권위자이며 알고 리스트 등으로 불렸다. 그의 연구는 수학 물리학뿐 아니라 의학 화학등 모든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었다.
러시아 독일에서 업적을 남긴 위대한 스위스인
그는 스위스인이지만 러시아 독일등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러시아에서는 위대한 수학자 오일러를 기념하여 1957년 러시아연방기념우표를 발행하였다.
우표에는 러시아 아카데미 교수이었던 레온하르트 오일러 탄생 250주년이라고 쓰여 있다. 러시아에서의 그의 삶이 얼마나 성실하였는지 알 수 있다.
당시 러시아 왕립 과학아카데미에는 요한 베르누이의 두 아들 다니엘과 니콜라스가 있었다. 니콜라스는 병으로 사망하였고 다니엘이 수학 물리학부의 교수직을 승계하면서 공석이 된 생리학 교수직에 오일러를 추천했다
오일러는 당시 바젤 대학의 물리학 교수직에 지원했으나 탈락하여 그는 이 제의를 수락했다. 1727년 오일러는 상트페테부르크에서 그는 의학부의 조교수에서 수학부의 교수로 승진했다.
그는 다니엘 베르누이와 같은 집에서 살며 공동 연구 작업도 하였다. 오일러는 상트페테부르크에 정착하여 살아갔다. 그는 러시아 해군의 의무관도 겸임했다. 왕립 과학아카데미는 교육을 통해 유럽과 러시아의 과학격차를 줄이는 것이 목표였다.
오일러 같은 외국 과학자에게 너무나 호감 가는 직장이었다. 아카데미는 풍부한 재정과 서적들을 모아놓은 방대한 도서관을 갖고 있었다. 또한 교수들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학생수를 줄여 강의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곳이었다.
강의를 줄여서 교수들이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과 휴식을 제공했다. 왕의 유언에 따라 연구에 많은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던 예카트리나 1세는 오일러가 상트페테부르크에 도착한 날 사망했다.
표트르 2세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왕족들은 어린 왕을 이용하여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아카데미의 외국인 과학자들을 왕족들은 신뢰하지 않았으므로 연구 예산을 삭감하였다.
오일러뿐 아니라 많은 외국인 교수들은 연구에 몰두하기에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다행히 표트르 2세가 일찍 사망한 후 재정적 지원은 조금은 나아졌다. 하지만 충분한 재정지원은 아니었다.
오일러는 아카데미 내에서 1731년에 물리학 정교수가 되었다. 그가 정교수가 된 후에 얼마 되지 않아 상트페테부르크의 검열과 외국인 차별에 실망한 다니엘 베르누이가 사직하고 바젤로 떠났다. 오일러는 그를 대신해 수학학부의 장이 되었다.
천재 오일러의 불행과 그를 인정한 스위스
오일러는 좌절의 기회와 수없이 맞닥뜨린 불행한 천재였다. 처음 러시아의 상트페테부르크 아카데미로 갔을 당시 그는 의학부교수로 임명받았다. 원하는 수학 연구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하지 않고 자신이 맡은 의학부를 위해 생리학 연구에 집중하였다. 그는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자녀들은 어린 나이에 많이 사망하는 불운을 격었다.
13명의 자녀 중 8명의 자녀가 그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오일러는 일찍 아이들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베를린 아카데미에 있을 때에도 왕과의 갈등에 시달렸다.
러시아로 복귀해서는 화재로 인해 연구 목록을 다 잃고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너무나 연구에 몰두하다 젊은 나이에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 이후 나이가 들어 왼쪽 눈까지 완전히 잃어 맹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다.
어려움과 좌절 속에서도 뛰어난 집중력과 정신력으로 그는 연구를 계속하고 논문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우수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이 올바른 인격 때문이었다.
오일러의 조국 스위스에서는 그의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를 비롯하여 국제 심포지엄등의 많은 행사들도 개최하였다. 오일러 기념우표와 티셔츠, 머그컵 등도 출시하였다.
스위스는 자신의 나라 출신 오일러를 소중한 존재로 기억하였다. 스위스에서는 오일러를 너무나 자랑스럽고 소중한 천재 수학자로 인정하고 알리고 있다. 불운하고 차별받고 힘들었어도 꿋꿋하게 이겨낸 오일러는 1783년 그의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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